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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나라 사람들, 맥켄지 가문(2) - 손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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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7:52:20






 

메리 제인 맥켄지(켈리) 선교사(Mrs. Mary Jane McKenzie(Kelly), 1880-1964)

:동역자들도 흠모한 믿음의 여인

메리 켈리(Mary Jane Kelly) 선교사는 188033, 호주 빅토리아주 북동부 보웨야(Boweya)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2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으며, 14살 때에 부흥사 존 맥닐(Rev. John McNeil)의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복음 전파에 대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1905, 그녀는 신학 공부를 마치고 빅토리아 장로회 선교사가 되었다. 그녀는 원래 중국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디크니스 선교사 훈련소에서 한국을 향한 부름을 받았다. 메리는 친구인 앨리스 니븐(Miss Alice Niven)과 함께 호주장로교 여선교회연합회 파송 선교사로 19051026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메리 켈리 선교사는 1905년 부임한 첫 사역지인 부산에서 2년을 사역한 후에, 진주로 가서 여인들과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때로는 하동 지역까지 노새를 타고 가서 성경을 가르쳤다. 19089월 동료인 커렐 선교사가 휴가를 떠나자 솔즈 선교사와 함께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던 19102, 맥켄지 목사가 부산지역에 부임해 왔다가 그 해 6월 진주 지역 선교사들의 활동을 돌아보기 위해 진주를 방문하게 되었고, 메리 켈리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맥켄지 선교사는 켈리 선교사를 흠모하게 되어 7월에 청혼을 하였다. 이 때 맥켄지 목사는 47세의 재혼이었고, 켈리 선교사는 32세의 초혼이었다.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12210, 그들은 홍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켈리 선교사는 결혼 후에 5명의 자녀를 두었음에도 더욱 활발히 선교사역에 헌신하였다. 한국말 성경 공부, 유아 복지 사역, 한국 사모들 교육, 나환자의 자녀를 위한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을 운영하는 등,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했고, 흠모했다. 그녀는 이해심이 깊고, 현명했으며, 동정심이 많았다. 더욱이 겸손하고 온유했으며, 잘 참았고, 남을 성급히 판단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진실과 정직과 순결과 사랑에는 담대하였다.

 

그녀는 19382, 30여년의 한국 사역을 마치고 남편 맥켄지 선교사와 함께 고국 호주로 돌아갔다.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호주에 돌아가서도 강연과 글로써 선교사역을 계속했고, 남편 맥켄지 목사가 교단 총회장으로 재임했을 때는 좋은 내조자였고, 가정에서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메리 켈리 선교사는 1964111, 84세로 동료 선교사들의 애도와 칭송 가운데 호주에서 소천했다.

이후 메리 켈리 선교사의 첫째 딸인 헬렌 맥켄지는 의사, 둘째 딸인 캐서린 맥켄지는 간호사로서 부모님을 이어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한국선교역사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헬렌 맥켄지 (Helen P. McKenzie, 매혜란, 1913-2009): 한국 모자 보건의 어머니

헬렌 맥켄지 선교사는 1913106, 부산 좌천동에서 출생하였고 이후 부산진교회에서 사무엘 마펫 목사님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1931년 평양외국인학교(고등부)를 졸업한 후 호주로 가서 멜버른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퀸 빅토리아병원에서 수련을 받아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일평생 사역했던 한국에 선교사로 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하자, 동생 캐서린과 함께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중국 운남성 키엔슈이(후에 진슈이로 개칭됨)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들은 중국인 의사들과 함께 병원과 간호학교를 설립했고, 이 병원은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곧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헬렌 멕켄지 선교사는 19522월에 동생 캐서린과 함께 자신들이 태어났던 부산으로 들어와 일신부인병원’(일신기독병원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날마다 새롭게라는 뜻의 일신(日新)’이란 이름은 멘지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일신여학교에서 따온 것이었다. ‘부인병원으로 이름 지은 것은 동생 캐서린과 같이 수련 받았던 병원처럼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병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병원의 설립 목적을 본 병원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본을 따라 그 정신으로 운영하며, 불우한 여성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육체적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정신을 구현한다라고 공포했다. 헬렌 선교사는 출혈이 심해 그 남편조차도 헌혈을 거부하는 산모에게 자신의 피를 헌혈하고 수술실로 들어가곤 했었다. 1962917, 병원 개원 10주년 기념사에서 매혜란 원장은 병원 임원들과 직원들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1952년 설립 때 왜 병원 이름에 기독’(Christian)이란 말을 쓰지 않았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의 제자로 예수님 앞에 결코 완벽한 증인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시험에 빠지게 될 때도 있겠지만 저와 직원들이 함께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제가 일신에 남기고 싶은 말은 기독교인인 여러분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하나님께 영광을!”

 

헬렌은 전쟁 피난민과 고아들과 극빈자들을 돌보았으며, 특히 산부인과 의사로서 조산사인 동생 캐서린과 함께 조산교육과 조산사 양성에 온갖 힘을 쏟았고, 산부인과 의사 수련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러다 창립 20주년이 되는 1972, 59세가 되자 병원장직을 한국인 김영선에게 이양하고, 1976년 호주로 귀국하였다. 헬렌은 호주로 귀국한 후 호주연합교회신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교회에서는 장로로, 성가대원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마음에 품었던 아버지 맥켄지 목사 전기 'Man of Mission' 을 출판하였다. 그녀에게는 그동안의 모든 공로가 인정이 되어, 호주·뉴질랜드 산부인과 학회에서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 ‘Honorary Fellowship of the Royal Australian and New Zealand College Obstetricians and Gynaecologists' 가 수여 되었다.

이후 2002, 그녀는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요양원에서 지내다 2009918일 큐(Kew)에 있는 카라나(Karana) 양로원에서 96세로 소천하였다. 201246,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의 공적을 기리며 최고의 영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캐서린 맥켄지 (Catherine M. McKenzie 매혜영, 1915-2005): 한국 조산학의 대모

캐서린 맥켄지 선교사는 1915,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진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로얄 멜버른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고, 1939년 호주 조산사 국시에 합격한 후 1940년에 6개월간의 영아 보육과정(Infant Welfare Course) 교육을 받았다. 이후 1944년까지 퀸 빅토리아병원과 로얄 빅토리아병원에서 간호 교수과를 수료하고 간호학과 교수 자격을 얻었다. 그녀는 한국 선교사로 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어렵게 되자, 1946117, 언니 헬렌과 함께 비행기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쿤밍으로 들어가 19509월까지 진슈이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2, 언니 헬렌과 함께 부산으로 들어와서 일신부인병원을 세우고, 조산사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6.25전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한국의 의료현장에서 모자보건 사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혼신을 다해 노력했다. 캐서린은 조산사 교육을 엄격하게 했고, 산모에게도 산전 진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계몽시켰다. 그녀는 안식년에 언니 헬렌과 함께 호주 전역을 돌며 한국의료선교에 필요한 자원을 모금하기 위해 맥켄지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 재단을 통해 조성된 맥켄지 기금’(Mackenzie Foundation)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난한 한국인들을 위한 무료진료에 큰 힘이 되었다. 1975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녀에게 나이팅게일 기장이 수상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후학들이 모자보건에 충실해 줄 것을 생각하여 오래 전부터 조산학 교과서를 준비해 왔었다. 마침내 1978년 출국 직전에 그녀는, 매혜영 저 제1간호조산학한국어 본을 출간하였다. 이 교재는 실기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국 조산교육 기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그녀는 1978년 호주로 귀국하였고, 20051월 말, 목욕탕에서 쓰러져 엡 워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2005210, 90세로 소천하였다.

 

 

매혜란 · 매혜영 자매 선교사는 한국이 가장 힘든 시기였던 6.25 전쟁 중에, 또한 당시 한국 정서 상 대우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과 아이들에게는 천사와 같은 분들이었다.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임산부를 진료하였고, 이들을 통해 수많은 신생아들이 생명을 구했으며, 이에 수많은 산부인과 의사들과 조산간호사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30대 처녀의 몸으로 이 땅에 와서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일신부인병원과 한국 모자보건사업을 위해 헌신했다. 이들은 손수 근검절약하며, 불평불만하지 않으며,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는 분들이었다. 두 사람 간에 성격은 확연히 달랐어도,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했다. 그들은 은퇴 후 자신들의 사역을 회고함에 있어, 대부분 불신자인 환자들과 대부분 신자인 직원들이 아침 회진하기 전에 병실에서 매일 함께 드리는 아침 예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고백했다.

필자소개

필자는 경희의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의학박사로서, 미국 삼라한의대학원을 졸업한 한의사이기도하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현재는 건양대학교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으며, 경주시 기독의사회 지도목사로도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