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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나라 사람들, 맥켄지 가문(1) - 손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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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8:17:54

선교스토리

 

예수나라 사람들, 맥켄지 가문(1)

 

손영규 / 경희의 79

한국 초기 선교사들은 서울 못지않게 부산 지역에서도 많이 활동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맥켄지 가문(家門)을 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가장 감당하기 힘든 사역들을 온갖 정성으로 감당했기 때문이다. 맥켄지 부부는 한일합방이 시작되는 1910년에 내한하여 30여 년을 그 누구도, 심지어 가족들도 외면하고 버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또한 그들의 딸들도 부모의 헌신을 본받아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이 땅에 들어왔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피난민들과 불우한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을 도와 이들의 육신과 영혼을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신생아와 영유아를 돌보는 모자보건 사업에 매진하면서 산부인과와 소아과 등의 의사들을 훈련시켰고, 조산 전문 간호사인 조산사들도 배출하였다. 아울러 후학들을 위해 의학서적들을 저술했으며, 주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들은 진정 이 땅을 찾아 온 예수나라 사람들이었고, 이 백성의 아버지요, 어머니였다.

 

1. 제임스 N. 맥켄지(James N. McKenzie, 매견시, 1865-1956): 한국 나환자의 친구

맥켄지 선교사, 선교사로 파송되다

맥켄지 선교사는 186518, 스코틀랜드(Scotland)의 로스(Ross) 주 유(Ewe) 섬에서 7남매 중 여섯 번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5살 되던 해에 가난한 가족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고, 그는 자신이 18살이 되던 해인 1883,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드와이트 L. 무디의 설교에 큰 도전을 받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글라스코우(Glasgow) 인문대학에서 수학한 후, 글라스고우 자유교회 신학교인 트리니티(Trinity)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18947, 영국에서 마가렛 B. 켈리(Margaret Blare Kelly; 메기, 1870-1908)와 결혼한 후 9월에 호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같은 해 12, 멜버른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빅토리아 장로회 선교사로 임명 받았다.

맥켄지 부부는 1895년에 식인종이 사는 남태평양의 산토(Santo) (지금의 비누아투 뉴헤브라이즈)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들의 사역은 이교도 원주민들과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세례를 주며, 교회를 세워 갔다. 그러다 190812월에 사랑하는 아내 메기가 흑수병으로 건강이 악화 되어 세상을 떠나고, 1909년 맥켄지 선교사 자신도 건강이 나빠지자 14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호주로 귀국하였다.

 

한국으로 파송 받아 나환자를 위한 사역들을 시작하다

1910221, 맥켄지 목사는 한국선교에 다시 도전을 받고 호주 빅토리아 장로회의 여전도연합회 후원으로 내한하였다. 그는 호주장로회가 주력하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사역 하던 중, 1905년 한국에 파송 받아 부산지역에서 사역하던 메리 제인 켈리(Mrs. Mary Jane Mackenzie : nee Kelly) 선교사와 19122월에 홍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슬하에 네 딸과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첫 딸 헬렌(매혜란)과 둘째 딸 캐서린(매혜영), 셋째 딸 루시와, 외아들 제임스(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막내 딸 실라이다.

 

맥켄지 목사는 엥겔(Engel, 왕길지) 선교사 등과 함께 부산·경남지역 52개의 시골 교회를 두루 맡아 사역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울릉도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맥켄지 선교사의 가장 큰 헌신은 나환자를 돌본 일이었다. 당시 부산, 경남 지역엔 많은 나환자들이 있었다(그 당시 나환자들의 1/3이 경상남도에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환자들은 적절한 치료나 보호 없이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다. 이에 1904, 의사 어빈과 의사 빈톤 그리고 스미스 선교사 등의 미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나환자를 돕기 위한 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190911, 나환자수용소가 영국 나병구호협회인 나병선교회의 지원으로 부산의 우암동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19125, 나환자수용소에 맥켄지 선교사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맥켄지 선교사는 정규 의학 수업을 받은 의사는 아니었지만,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에서 일정 기간 의학 훈련을 받은 준의사(準醫師)였기에 의료사역에도 관심이 많았다. 맥켄지 선교사는 1931년 한국에서 실시한 필기시험으로 의사 자격증을 수여 받았다-.

이후 나환자 수용소는 점차 늘어나는 나환자로 인하여 몇 차례의 증축을 거듭했으며, 1922년에는 감만동에 약 4,000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상애원(相愛園’)을 개원하게 되었다. 상애원에 나환자 치료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처방법이 도입되면서 초기에 25% 가량 하던 사망률이 1922년에는 2%로 감소되기도 했다.

 

상애교회를 세우다

나환자 진료 외에 맥켄지 선교사의 주요사업은 완치된 환자들을 위한 정착사업 등이었다. 그는 나환자들의 자녀들인 미감아들의 교육을 했으며, 격리를 위한 고아원인 시온원도 설립했다. 이렇게 맥켄지 목사는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면서도 자기의 삶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나환자들을 충분히 돌보지 못함에서 오는 안타까움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오늘 나는 두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 나환자의 수용을 거절해야 했다. 그 두 명의 남성은 모르는 사람의 등에 실려서 나의 집 문 앞까지 찾아왔다. (중략)나는 기독교 선교사인데 나환자 수용소의 수용인원보다 더 많이 수용된 탓에 그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수용해 주었다면 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중략)그것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현재 편안한 내 침대로 들어가 자려는 순간에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이 영하의 날씨에 내일 아침이 되기 전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정춘숙 편저, 맥켄지의 딸들68p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살아가는 나환자들은 맥켄지 선교사 부부의 헌신에 감동되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들에 의해 상애교회가 세워졌다. 한편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태어나 평양신학교를 재학 중이던 손양원 전도사는 이런 맥켄지 목사의 헌신에 감명을 받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맥켄지 목사를 도와 나환자를 돌보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손양원 전도사는 상애교회에서 1933년까지 봉사하며 여러 마을에 신자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상애교회는 1924년부터 10년 동안 손양원 목사를 후원했다. 손양원 목사의 소록도 애양원 사역은 맥켄지 선교사와의 상애원 사역으로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다.

 

한국 나병 환자의 친구

맥켄지 선교사는 19382, 73세의 나이로 한국 선교사 사역을 마쳤다. 30년 세월이었다. 호주로 돌아 간 그는 1940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회 교단 총회장으로 취임했고, 특히 교회연합 운동과 인종차별 반대운동에 헌신하였다. 맥켄지 목사는 호주에서 여러 지병으로 병원 생활을 하던 중 19567292세로 소천하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드릴만한 타고난 재능도, 돈도 없었기에, 64년 전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만약 내게 100번이라도 다시 생명이 주어진다면, 나는 매번 해외선교의 현장을 선택할 것이다.”

지금도 호주 멜버른의 가족묘역에 잠들어 있는 그의 묘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한국 나병 환자의 친구, 노블 맥켄지 여기에 잠들다

 

 

 

 

 

 

*맥켄지 가문(2)은 다음 호에 연재됩니다.

 

 

필자소개

필자는 경희의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의학박사로서, 미국 삼라한의대학원을 졸업한 한의사이기도하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현재는 건양대학교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으며, 경주시 기독의사회 지도목사로도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