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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경남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들_ 부경사랑하사 - 손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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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8:18:16

· 남을 사랑나님의 람들_ 부경사랑하사

손영규 / 경희의 79

 

 

부산·경남 지역 의료선교의 시작: 하디(Dr. Robert Hardie)

부산·경남 지역의 의료선교는 의사 하디(Dr. Robert Hardie)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1890년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930일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YMCA)의 파송을 받고 부산에 도착하여 의료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토론토 대학 동문인 게일 목사(Rev. J. S. Gale)와 함께 부산에서 선교하다가 잠시 서울에 올라와 토론토 의과대학 동문인 의사 에비슨과 협력하여 제중원에 일시 근무하였다. 그 후 1891414,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의료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그 해 봄에는 본국으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원활하지 못하여 호주장로회 선교사로 이적하려고 고려한 적도 있었다. 189211, 하디 선교사는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서 독립 선교사 펜윜(Rev. Malcom C. Fenwick) 집의 방 한 칸을 빌려 간이진료소와 시약소를 운영하며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다. 1898년엔 캐나다 YMCA와의 계약기간이 끝남으로써 미남감리회로 이적하고 목사가 되었다.

 

의료선교가 확장되다

하디 선교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부산 지역에 들어온 의료선교사는 189112월에 미북장로회 파송을 받은 의사인 브라운(Dr. Hugh M. Brown)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를 설치하고 의료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주로 위생점검과 검진 및 시약 등에 주력하였다. 그는 결핵 감염으로 부산에 온 지 2년 후인 1893년에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이어 189311,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의사선교사 어빈(Dr. Charles H. Irvin)을 부산에 파송했다. 그는 부산 영주동 영선고개에 어을빈의원을 개업하면서 유명해졌다. 그 후 19039, 부산·경남 지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전킨기념병원(Junkin Memorial Hospital)'이 어빈 선교사를 중심으로 건립되었다. 1904년 당시 전킨기념병원을 중심으로 부산에는 17명의 의사(외국인 의사, 일본인 의사, 한국인 의사)2명의 치과의사, 2명의 약사, 11명의 조산원 등 32명의 의료진이 있었다. 전킨기념병원이 설립된 이래 8년간, 6만 명의 환자가 여기서 치료를 받았다. 이 병원은 선교병원답게 매일 예배로 진료를 시작하였고,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약 처방전, 약포장지, , 의료관계 상자 등에 성경말씀을 인쇄하여 배부하기도 했다. 어빈은 19113월 말까지 부산에서 일한 후 선교사직을 사임했으며, 이 후에는 밀스(Dr. R. G. Mills)와 비거(Dr. J. D. Bigger) 등의 의사들이 이 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근무하였다.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다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es) 목사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Davies)와 함께 1889102일 내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호주의 빅토리아장로교 청년연합회(YMFU: Young Men's Fellowship Union)의 후원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189045, 데이비스(J. Henry Davies) 목사가 열병(천연두와 폐렴)으로 말미암아 34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복병산 언덕 작은 외국인 묘지에 안장 되었다. 그러자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는 호주로 되돌아갔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갑작스러운 순직은 도리어 호주장로교회에 큰 도전이 되었다. 급기야 18907월에 장로교여선교회연합회(PWMU)가 결성되었고, 호주장로교회는 청년연합회와 더불어 한국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911012, 호주장로교 청년연합회 소속의 제임스 맥케이(James H. Mackay) 목사와 부인 사라(Sara) 그리고 여선교회연합회 소속의 3명의 여선교사들-벨 멘지스(Miss. Belle Menzies), 메리 퍼셋(Miss. Mary Fawcett), 진 페리(Miss. Jennie Perry)-이 부산에 들어왔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초가집을 구입하여 지냈는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다. 맥케이 목사의 부인 사라는 부산에 도착한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맥케이 목사는 메리 퍼셋 선교사와 재혼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여 호주로 귀국하게 되었다. 진 페리 선교사도 3년 정도 사역을 한 후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벨 멘지스 선교사만이 역경 가운데 분투하면서 부산진을 거점으로 하여 선교사역을 지속했다. 그녀는 고아원 사역에 주력하여 서울 이남에 최초의 여학교인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1895년에 개교하였다. 이 이름은 주님 안에서 날로 새롭게(日新)’ 되길 간절히 바라는 뜻으로서, 멘지스 선교사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박신영 장로가 제안하여 지어졌다. 이로 인하여 일신(日新)’이란 말은 부산·경남 일대에 일신여학교’, ‘일신병원’, ‘일신교회등으로 사용되며 기독교 선교사역의 상징적 용어(symbol)가 되었다. 18928월에 내한한 엘리자베스 무어(Miss Elizabeth S. Moore) 선교사가 멘지스 선교사를 도와 사역했고, 1894년에는 앤드류 아담슨(Rev. Andrew Adamson) 목사 부부가 두 딸과 함께 내한하였는데, 부인 애니(Mrs. Eliza Annie Adamson)는 부산에 온 지 16개월 만에 3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이후 아담슨 목사는 애니의 친구 선교사였던 페인(Camila G. Pain) 양과 재혼하여 1914년 은퇴하기까지 20년간을 부산·경남 지역 선교에 매진하였다.

 

이윽고 1895, 아그네스 브라운(Miss Agnes Brown) 선교사가 내한하여 1938년 은퇴하여 고국 호주로 귀국하기까지 42년 동안 열심히 헌신하였다. 특히 190010월에 엥겔(Rev. Gelson Engel) 목사가 부인 클라라(Mrs. Clara Bath Engel)3명의 자녀와 함께 내한하였었는데, 1906년 부인 클라라가 소천하게 되자 엥겔목사는 자신보다 먼저 내한했던 아그네스 브라운 선교사와 재혼한 후 더욱 선교에 열심을 다하였다. 엥겔 목사는 1938년 은퇴하여 귀국하기까지 38년 동안 부산진교회 초대 당회장, 부산진 일신여학교 교장, 평양신학교 교수, 한국성서번역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대 총회장 등의 중요한 사역들을 감당했다. 특히 맥켄지 목사와 협력하여 많은 지역 교회들을 섬기기도 했다.

 

경남지역 의료선교의 시작: 휴 커렐(Dr. Hugh Currell) 의사 부부

호주장로회 선교부의 부산지역 의료선교는 19025, 휴 커렐(Dr. Hugh Currell) 의사 부부가 부산으로 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가 작성한 사역 보고서를 보면, 자신은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의료사역을 시작했고, 몸이 심히 아픈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환자를 돌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부산에 온 지 4개월이 지난 9월에는 부산과 인근 지역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약품과 소독약을 분배하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의 활동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지역사회에 대한 큰 공헌이었다. 그를 부산으로 오게 했던 미북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스 목사(Rev. James E. Adams)는 다음과 같은 글을 담겼다.

 

커렐 의사의 내한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또 다른 실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커렐 선교사는 부산·경남 지역의 의료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부산 지역은 일본인 의료진과 미북장로회 의료선교부가 활동하고 있는데 반해, 경남 지역의 의료 형편은 시약소 마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그는 호주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고는 곧바로 진주로 갔다. 그는 진주 땅을 밟은 첫 서양인이자, 첫 의사였다. 그는 진주교회를 설립하고, 경남지역 최초의 서양병원인 배돈병원(Mrs. Paton Memorial Hospital)을 건립하였다. 의사 커렐의 부인은 시원여학교 및 광림남학교 등을 설립했다. 커렐 부부는 경남 지역에서 의료와 교육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맥켄지가문의 선교활동

19102월에 부산으로 들어 온 맥켄지 목사(Rev. James Noble Mackenzie : 매견시)는 메리 켈리 (Mrs. Mary Jane Mackenzie : nee Kelly) 선교사와 19122월에 결혼하였다. 한국에서 이 부부의 장녀로 태어난 의사였던 헬렌 맥켄지(Dr. Helen Pearl Mackenzie : 매혜란) 선교사와 차녀인 간호사 캐서린 맥켄지(Miss Catherine Magaret Mackenzie : 매혜영) 선교사는 한국 선교역사에 큰 역할을 감당했었다.

 

먼저 맥켄지 목사는 부산 감만동에 나환자촌인 상애원을 운영하면서 부산·경남 일대의 많은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맥켄지 목사는 자기의 삶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겨울철에 상애원에 입원을 원하는 나환자들을 자리가 없어 거절해야 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밤에 편안한 잠자리에 갈 때, 낮에 돌아가라고 강요했던 불쌍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혹시 내가 입원을 거절했기에 아침이 오기 전에 얼어 죽어 버린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날이 많아졌다

 

손양원 전도사가 맥켄지 목사를 도와 나환자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도 이 때다. 맥켄지에 의해 세워진 나환자 정착촌교회는 1924년부터 10년간 손양원 전도사를 후원했다. 이 사역의 영향으로 손양원 목사는 이후에 여수 애양원 사역에 전력하게 되었다.

1910년 이후의 선교활동

1910, 간호사 클라크(Miss. F. L. Clerke) 선교사가 들어 왔고, 같은 해 1029일에는 간호사 마가렛 데이비스(Miss Margaret S. Davies) 선교사가 들어와 배돈병원에 근무했다. 그리고 마가렛 데이비스의 여동생인 의사 진 데이비스(Dr. Jin Davies)1918년에 부산으로 들어왔다. 이들 자매는 부산에 온 선교사 중 최초로 순직한 헨리 데이비스 목사의 동생인 존 데이비스(Rev. John Davies) 목사의 딸들이었다. 마가렛 선교사는 교육 등 여러 면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1940년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로 추방을 당하였다.

19112, 마가렛 알렉산더(Miss Margaret L. Alexander) 선교사가 내한하여 일신여학교에서 제3, 5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는데, 1941년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는 의사 맥클라렌(Dr. McLaren)이 파송되어 왔다. 그는 당시에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으며, 진주 배돈병원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도 봉직했다.

1912년에 부산에 들어 온 뉴질랜드 출신의 알버트 라이트 목사(Rev. Albert Wright : 여원배)1915년에 엘리스 니본 선교사(1905년 내한)와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성경학교, 고아원, 여성 나병환자 관리 등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료와 교육에 열중했다. 엘리스 니본 선교사는 192712월 과로로 인해 51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라이트 목사는 1941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30년간 부산·경남 일대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 후 19163, 호킹 (Miss. Daisy Hocking) 선교사가 부산에 와서 사역하였다. 그녀는 특히 학생 독립운동과 청년찬양대 찬양 지도자 육성 사업에 기여했다.

19134, 의사 테일러(Dr. William Taylor)가 내한하여 경남 통영(지금의 충무) 지역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인접한 섬사람들의 건강과 보건증진을 위해서 작은 보트를 타고 다니며 순회 진료도 감행하였다. 1918년엔 워터스(Miss. Murel Withers) 선교사가 교육선교사로 활동하였었는데, 이는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호주인으로서는 마지막 교장으로 사역한 것이었다. 그녀는 부산진교회 찬양대 지도를 맡았으며 영어와 서양요리도 가르쳤다.

 

계속되는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활동

이상과 같이 호주장로교회의 제1기 한국선교 활동은 1889년 데이비스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어 19414월 호주선교회가 태평양전쟁으로 본국으로 철수할 때까지 이루어졌다. 약 총 78명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였고, 주로 부산·경남의 5개 지역 즉 부산,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지에서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은 주요 사역 중의 일환으로서 특히 교육사역을 시행하였다. 지역마다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부산진일신여학교(1895), 동래일신여학교(1909), 동래여자실수학교(1935), 의신학교(1913), 호신학교(1925), 복음농업실수학교(1933), 거창 명덕학교 강습소(1915), 통영 진명학교 등을 설립하였다(이 외에도 다수). 의료기관으로는 진주에 배돈병원(1909)을 건립하였으며 부산나병원인 상애원이 1911년부터 운영되었다. 그리고 부산진교회를 비롯하여 부산, 경남 일원에 수많은 교회들도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펼치시고 또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사역들 곧, 가르치고, 전하고, 치유하신 본을 따라 선교사들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역했다. 호주선교사들은 태평양전쟁으로 인하여 1941,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로 추방되기까지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리고 때가 차매 그들은 다시 부산·경남으로 되돌아왔다.

 

호주선교회의 제2기 한국선교 활동은 한국이 일제(日帝)로부터 독립되고 이어 한국전쟁을 치르게 됨으로써 재개되었다. 이 때 주목할 것은 제2기 한국선교는 맥켄지 자매를 비롯한 한국에서 태어난 선교사 2세들이 주역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의료선교 활동은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50년 이후로 내한하여 활동한 제2기 호주선교사들은 약 50(중복 2명 포함)에 이른다. 호주선교회는 1889년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약 126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던 것이다. 최근까지 호주선교부와 관련된 기관은 재단법인 한·호기독선교회와 그 산하에 (부산)일신기독병원과 화명일신기독병원만이 남아 있다.

 

부경(釜慶) 산야(山野)를 돌아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부산·경남 지역의 선교사역은 호주장로회 선교부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각국 대부분의 선교사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호주장로회 선교부 사역들도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모델로 삼고 가르치는 기독학교 사역 및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개척 사역, 치유하는 기독병원 사역들로서 함께 펼쳐졌다. 19세기 말부터 21세기에 걸쳐 펼쳐온 호주선교부의 부산·경남 사랑은 부모 선교사를 넘어 자녀 선교사로 이어간 사랑의 여로(旅路)’였다. 이 분들은 진정 경계를 넘어 약함에 던져진 이들이었다. 우리 주님이 그리했고, 믿음의 사도들도 그리했듯이!

호주선교부의 첫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가 부임한지 6개월 만에 순직한 후로, 이와 빈대가 득실거리는 허름한 초가집에 거처하면서 많은 여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단연코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가정을 꾸려 자녀들을 양육했으며, 또 다시 그 자녀들을 선교사로 육성했다. 부모와 형제들도 내버린 나환자들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섬겼다. 그리고 도시와 시골로 들어가서 교회를 세웠다. 이들의 가르침 속에서 주기철(경남 창원군, 1897년 출생)과 손양원(경남 함안군, 1902년 출생)등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라났다.

 

요즘, 부경누가회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 온다. 부경(釜慶) 이 땅! 정녕 우리 선교사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닦아 온 곳이던가! 넘실거리는 부경(釜慶) 앞 바다의 파도같이, 부경(釜慶) 산야(山野)를 돌고 돌아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같이, 선교사들의 피와 땀은 아직도 이곳에 흐르고 있는데!

 

필자소개

필자는 경희의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의학박사로서, 미국 삼라한의대학원을 졸업한 한의사이기도하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현재는 건양대학교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만나고 있으며, 경주시 기독의사회 지도목사로도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