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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특명사신들 - ‘마펫’ 선교사 가문 - 손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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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8:18:36

복음의 특명사신들 - ‘마펫선교사 가문

손영규 / 경희의 79, 건양대 대학원 치유선교학과 주임교수

 

 

조선시대, 특별히 신임하는 당하(堂下:3품 하계 통훈대부 이하) 관원을 지방 군현에 비밀리 파견해 시정을 감찰하게 한 왕의 특명사신을 암행어사(暗行御使)’라고 불렀다. 보통 암행어사는 역마 사용권을 부여하는 증패인 마패(馬牌)’란 것을 소지하였는데, 이는 소지자가 봉명사신(奉命使臣)임을 입증하는 것으로써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한편 때는 조선 말엽, 만국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특명사신으로서 천국의 마패를 지니고 한국 땅에 파견된 가문(家門)이 있었으니, 바로 마펫(馬布) 선교사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사무엘 오스틴 마펫(마포삼열)과 그의 부인 엘리스 피쉬 및 루시아 피쉬, 사무엘 휴 마펫(마삼락) 부부, 그리고 하워드 F. 마펫(마포화열) 부부 선교사들의 가문으로서, 이들 모두는 천국의 소명을 가진 복음의 특명 사신들이었다.

 

 

1. 그리스도의 복명사신:

사무엘 오스틴 마펫 목사 (Rev. Samuel Austin Moffett, 한국명: 마포삼열(馬布三悅), 1864-1939)

 

1864125,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한 마포삼열 목사는 1884년 하노버대학(Hanover College)에서 자연과학부(화공학 전공)를 졸업하였고, 이후 존스홉킨스대학에 진학하여 박사학위 과정을 준비하려다가 마음을 돌이켜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1888, 그는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수많은 해외선교사들을 길러낸 맥코믹신학교(McComick Seminary)를 졸업하였고, 그 후 미조리주 애플튼시의 제일장로교회에서 약 1년 간 시무하다가 1889415,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한국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같은 해 12, 마포삼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요코하마로 오는 배에 올랐다. 그는 한국을 향해 출발할 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알기로 결심했습니다. 1890125, 드디어 마포삼열은 26세가 되는 그의 생일에 미혼으로 인천 제물포항으로 들어왔다. 그는 6개월간 한국말을 익혔는데, 그 때 그에게 한국말을 가르친 선생은 바로 황해도 소래에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서상륜(徐相崙)이었다-마포삼열은 어학에는 별다른 소질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36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1-1. 복음 전도와 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 설립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그의 사명을 굳게 다짐했었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었다. 이 결심은, 내가 이 나라에 십자가의 도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그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세게 결심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도 사역보다는, 미개척 지역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서상륜의 안내로 개성을 거쳐 평양, 안주, 박천을 지나 용천, 의주에 당도한 그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 지역까지 수차례의 전도탐색 여행을 한 후에, '평양'을 선교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곧 그는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설치하였고, 작전참모이자 오른손과 같은 조력자인 한석진(韓錫晉)과 함께 활발히 전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노방 전도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는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던 것이었고, 둘째는 평양에 서양 선교사가 왔음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벽안의 훤칠한 모습을 지닌 마포삼열 선교사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으나, 반면 불신자들에게는 조롱과 야유와 돌팔매질도 당해야 했다. 이기풍(李基豊)의 투석으로 부상을 당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편 노방전도와 함께 그가 시작한 것은 사랑방 전도였다. 교회가 없던 곳이라 할지라도, 마포삼열 선교사는 가는 곳마다 저녁이 되면 넓은 사랑방을 빌려서 복음을 가르쳤고, 주일예배를 드렸다. 마포삼열 목사가 지향하는 최대의 지표는, ‘이교도인 한국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목회의 중심이며 구심점이라고 볼 수 있는 교회 설립을 모든 일보다 최우선순위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포삼열 목사가 네비우스(Nevius) 선교사의 자급, 자립, 자치3자 선교전략을 수용하여 자신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도 이런 까닭에서다.

평양에서 전도하던 마포삼열목사는 최치량(崔致良) 만나게 된 이후로는 널다리골에 있는 그의 여관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여관 벽은 온통 한문 성경으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이 성경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들어 왔던 영국인 토마스 목사에 의해 전해진 것이었다. 그 후, 마포삼열 목사는 최치량과 함께 의논한 끝에 당시 평양의 중심지인 널다리골에 홍종대 소유의 큰 기와집 한 채를 구입하여 교인 7인으로 교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평양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선교본부였고, 후일 장대현교회의 전신이 되는 널다리골교회인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평안남북도에는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그를 가리켜 저 거리의 사람을 보라’(the looking up the road man)라고 일컫기도 했다.

이렇듯 마포삼열 목사의 복음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 덕분에, 그가 나중인 1936년 본국으로 귀국할 당시에는 교인이 한 명도 없던 평양 주위에 이미 장대현교회, 산정현교회 등 1천여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신도 또한 15만 명이 되어 있었다. 곧 그로 인하여 한국교회 안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독노회(全國獨老會)’가 세워지게 되었고, 이에 마포삼열목사는 191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헌신하게 되었다.

 

1-2. 교역자 양성과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

마포삼열 선교사는 신학교(神學校) 설립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교회 설립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긴 그였기에, 교회를 섬길 목회자의 양성소가 될 신학교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에서였다. 당시엔 이미 1890년부터 서울에서 언더우드 목사를 중심으로 공부해온 신학반이 있던 터였고, 여기서 대략 1개월 동안 공부를 마친 사람은 전도인(傳導人)’이라는 명칭을 받아 각 지방으로 흩어져 사역을 할 수 있었다. 1900, 마포삼열 목사는 이러한 신학반을 정규적인 신학교로 승격시켜 볼 구상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미북장로회 선교본부로부터 신학교 설립을 허락 받게 되었다.

1901, 평양에서 처음으로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904, 평양공의회에서는 마포삼열 목사를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추천하였다. 당시 교수로는 언더우드, 전위렴, 왕길지, 이눌서 등이 있었다. 한편 1907년은 뜻 깊은 해였다.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한국인 목사 7(서경조(58), 한석진(41), 송린서(40), 양전백(39), 방기창(58), 길선주(40), 이기풍(40) 목사)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장이자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회장이었던 마포삼열 목사의 지대한 헌신의 열매였다. 이후 마포삼열 목사는 1924년까지 신학교 교장직에 있으면서 김익두, 함태영, 김선두, 남궁혁, 주기철, 채필근 등 800여 명의 목사를 배출했다.

 

1-3. 교육 선교와 의료선교 사역

마포삼열 목사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면서 제일 먼저 시작한 사업이 교육 사업이었다. 그의 교육철학은 인간 개발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다. 그의 교육 철학은 복음 전도를 위한 교육이었으며, 교육에서 시작하여 복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복음에서 시작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결국 복음에 이르게 한다는 전략이었다. 또한 그는 교육 사업의 목적을 신자들의 자녀 교육과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두었다.

이 교육 목적들을 가지고, 마포삼열 목사는 그가 내한한 첫 해에 언더우드가 운영하던 예수교학당을 맡아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1894, 평양 널다리골교회에서 이영언(李永彦)을 교사로 삼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숭덕(崇德) 소학교의 전신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3백여 소학교가 건립되었으며 평양에 ‘3(三崇)’으로 불리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역시 마포삼열 목사의 도움을 받아 설립되었다. 또한 숭의여학교(현재,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숭의여자대학교의 전신)도 마포삼열 목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곧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에 이르자, 마포삼열 목사는 신앙인으로서 이를 강력하게 저항했다. 하여 그가 설립한 기독교계 학교들도 이 저항에 따라 동참했다. 숭의여학교 교사와 졸업생, 재학생들은 1913년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송죽회(송죽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투사들의 국내외 활동비를 지원했다. 또한 3·1운동 때는 밤새워 태극기를 그린 뒤 만세운동에 앞장섰으며 여성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결국 1938, 평양신학교와 숭의여학교등 기독교계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함에 따라 자진 폐교 조치까지 감행하게 되었다.

한편 마포삼열 목사는 한국에서 선교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교육사업과 더불어 의료 사업도 함께 병행해 나갔다. 이러한 병행조치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시키는 데 그 주요 목적이 있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역으로도 의료사업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알렌이 세운 최초의 의료기관인 제중원은 한국 선교에 여러 면에서 지대한 공헌과 의미를 내포했다. 그러나 선교사들 간에는 의료사업에 대한 견해가 상반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의 선교사들은 의료사업을 교회확장과 같은 비중에 두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선교병원의 모든 활동이 복음전도에 있다고 보고 의료사업을 교회확장과 같은 비중으로 보는 선교사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마포삼열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는 선교사가 경영하는 한에 있어서, 의료사업 자체는 기독교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의료선교 사역이 한국 교회사에 있어 교회설립기독교 교육사업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가지게 된 것에는, 마포삼열 목사의 아내였던 의료선교사 엘리스 마펫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1-4. 한국교회의 아버지 - 마포삼열 목사

마포삼열 목사는 항상 앞을 바라보며 미리 계획했고, 이렇듯 그의 계획은 훈련된, 교육받은, 성숙한, 그리고 전도하는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교회, 신학교, 기독교학교들을 비롯한 모든 복음의 사역들은 마포삼열 목사에 의해 한국인에 의한 자립, 자전, 자치의 모습을 중심으로 나아감에 따라 날로 발전해 갔다. 그래서 마포삼열 목사는 일제가 세계제국의 건설을 꿈꾸면서 강렬한 탄압정치를 펼치고 있을 당시에도 앞장서서 항일운동에 동참했던 것이다. 일제가 강하게 추진한 신사참배우상숭배로 규정한 마포삼열 목사는, 자신이 속해 있는 평양신학교를 위시한 기독교학교를 자진폐쇄 하면서까지 극렬히 저항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와 그의 아내는 심신이 병들고 쇠약해져갔다.

1936, 72세가 된 마포삼열 목사는 황급히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그가 건강이 악화 되어 치료차 급히 한국을 떠나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출국한 것이었다. 당시 활동하던 선교사들 중에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가장 정면으로 반대했던 마포삼열 목사에 대한 암살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포삼열 목사는 평양에 아내 루시아 피쉬와 막내 아들 토마스를 남겨둔 채, 상황이 좀 나아지면 곧 돌아 올 것으로 생각하고 왕복표를 사서 황급히 평양을 떠났다.

마포삼열 목사는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여러 번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도했다. 그러나 한국 내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이 같은 노력이 번번이 무산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매우 절망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절망감은 그의 건강 또한 더욱 악화시켰고, 그 후 그가 소천하기까지의 3년여 간의 삶은 생활고와 겹쳐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마포삼열 목사의 넷째 아들인 마포화열 박사는 그 때 상황을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막내가 돌아온 후 로스엔젤레스 근교인 몬로비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집은 당시 창고를 개조한 작고 허름한 집이었지요. 당시 그 집은 정식 번지 등록조차 없어 00번지 2/1로 명기되었는데, 아버지는 이곳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지요. 당시 형(마삼락)은 신학교 재학 중이었고, 나는 의대 재학 중이었으며, 막내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생활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 생각만 했어요. 일본의 압제로 고통당하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셨죠. 그리고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 그 곳에 묻히겠다는 게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이었습니다.”

 

2006, 한국교회의 아버지였던 마포 삼열 목사 부부의 유해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근교의 카펜테리아 공원묘지(Carpenteria Cemetery, 1501 Cravens Ln, Carpinteria, CA 93013)로부터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으로 이장 되었고, 흉상 또한 세워졌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70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곳으로 돌아 온 것이다.

 

 

2. 하늘의 양식, 일어(一魚):

엘리스 피쉬 마펫 (Merry Alice Fish Moffett, 1870-1912)

 

1897124,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메리 엘리스 피쉬(Dr. Merry Alice Fish)가 내한하였다. 이듬해인 1898년 초, 평양지부에 배치된 그녀는 먼저 와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사무엘 A. 마펫(마포삼열) 목사와 결혼하였다. 그 후 엘리스 마펫은 의료선교사로서의 활동도 열심히 해 나갔지만, 특히 여성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1, 그녀는 평양에서 여성 성서연구반을 조직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그녀는 이곳에서 죄에 관한 문제를 위시하여 회개, 신앙, 구원 등의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다), 이는 대단히 인기가 있어 참석 인원이 계속 늘어났다. 마포삼열 목사는 이 여성 성서연구반의 개설이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믿었다.

한편 엘리스 마펫 선교사는 1903년부터 평양외국인학교 중등교육과정의 책임자가 되어 학교 안에 독서실을 마련하고, 미국에서 나오는 신간 서적을 때마다 구입하여 비치하게 하는 등 면학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1904년부터는 그 해 3월 개교한 평양맹학교에서 맹인 학생들을 위한 신앙지도에 정성을 다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본의 통치와 기독교 박해를 강하게 비판하며 국제적인 여론을 일으켜 일제의 불법적인 지배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엘리스 마펫 선교사는, 남편인 마펫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27, 안타깝게도 의사인 엘리스 마펫 선교사는 의료 및 교육 사역에 과로한 나머지 이질에 걸려 보름 동안 계속 되는 심한 설사를 이기지 못하고 평양에서 소천하였다. 그녀의 나이, 겨우 마흔 두 살이었다. 엘리스 마펫은 마포삼열 목사와의 사이에 제임스(James Mckee Moffett)와 찰스(Charles Hull Moffett) 두 아들을 두었다. 후에 그녀의 아들인 제임스 마펫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국내 선교사로 활약을 했으며, 찰스 마펫은 목사로서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후에 미국에서 목회를 하였다.

3. 하늘의 양식, 이어(二魚): 루시아 피쉬 마펫

(Lucia Hester Fish Moffett, 1877-1962)

 

1915, 마포삼열 목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사촌 여동생인 루시아 H. 피쉬(Lucia H.)와 재혼하였다. 이들 사이에는 세 아들이 태어났는데, 사무엘 휴 마펫(Samuel Hugh Moffett), 하워드 F. 마펫(Howard Fergus Moffett), 그리고 토마스 F. 마펫(Thomas Fish Moffet)이다. 마포삼열 목사의 다섯 아들들은 항상 서로를 ‘3/4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어머니들이 서로 사촌이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아들인 사무엘 휴 마펫은 목사로서, 넷째 아들인 사무엘 하워드 마펫은 의사로서, 부모를 이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마포삼열 목사의 두 부인이 되는 엘리스 피쉬(Merry Alice Fish)와 루시아 피쉬(Lucia H. Fish)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과 사진들이 별로 남겨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펫 목사와 함께 했던 이 두 부인들(二魚), 분명 그녀들의 다섯 아들들(五餠)과 함께 한국 땅에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재현시켰음이 자명하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떡을 먹이며 영육(靈肉)을 고친 그녀들은 천국의 마패를 지닌 특명사신들이었던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신 : 사무엘 휴 마펫

(Samuel Hugh Moffett, 한국명 : 마삼락(馬三樂), 1916-2015)

 

사무엘 휴 마펫(마삼락) 박사는 마포삼열 목사의 셋째 아들로서 191647,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중고등교육 과정을 마치고 나서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그 곳에서 휘튼대학교(고전학 전공)를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인 1942년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같은 해, 휘튼에서 재학 중에 만난 엘리자베스 타란트(Elizabeth B. Tarrant)와 결혼했다.

이후 마삼락 박사는 1947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의 옌칭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1949년에는 남경의 남경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1951, 중국에서 사역하다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한 그는, 그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돌아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강사로 재직했다. 이 때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암 투병 중에 소천 했다.

1955, 한국 전쟁이 끝나자 마삼락 박사는 한국으로 들어와서 선교사로 섬겼다. 1956, 그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아일린 플라워(Eileen Flower)와 서울에서 재혼한 후, 1959년부터 1981년 은퇴할 때까지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수와 대학원장 등으로 봉사했다. 1981, 그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을 설립하는데 기여하고 초대 원장을 지냈다. 또한 그는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서 헨리 루스 석좌 선교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특히 1977년 모교인 프린스톤신학교로부터 학교를 빛낸 동문상’(1997년에는 아일린 마펫이 같은 상을 받았다)을 받았고, 1981년에는 한국정부가 주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아일린 마펫는 1981년 이후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와, 프린스턴신학교 루스도서관에 남편 마삼락 박사와 함께 정리하여 기증했던 마포삼열자료, 그리고 다른 중요한 선교사의 자료들을 30년 동안 거의 매일 컴퓨터로 타이핑하여 정리하기도 했다.

201529, 한국 장로교의 성장과 역사에 크게 공헌한 마삼락 목사(Rev. Samuel H. Moffett)는 프린스턴 원드로스에서 향년 98세로 소천했다. 그리고 2015829, 그의 유해는 부모님이 묻혀 있는 로스엔젤레스 근교의 카펜테리아 묘지(Carpenteria Cemetery, 1501 Cravens Ln, Carpinteria, CA 93013)로 안장 되었다. 영결식에서 부인인 아일린 마펫 사모는 마삼락 박사를 회고하기를,

 

"남편은 한국 사람을 정말 사랑했다. 어릴 때 남편은 한국인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남편의 심장은 한국인이다. 평양에서 성장하면서 남편의 마음에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늘 있었다. 한국 분들을 존경하고 진실로 사랑했다. 한국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한 한국인들의 어려움과 아픔이 그를 슬프게 했다"

고 말했다.

 

프린스턴신학교 이사이자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인 임성빈 박사 또한 마삼락 박사의 학문적, 교육적 업적을 회고하기를,

 

한국 교회는 작고하신 마삼락 박사를, 그의 아버지 마포삼열 박사가 시작한 사역을 계승한, 위대한 신학교육자로 기억할 것이다. 마삼락 박사는 한국교회를 세계교회의 지평으로 이끈 선교적 학자이자, 한국교회의 역사를 아시아 전반의 맥락 속에서 조명하게끔 한 교회역사가(敎會歷史家)이다.”

라고 말했다.

 

프린스톤신학교 쉐인 버그 부총장 또한 그리스도의 사신(고린도후서 5:16-21)’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그를 추모하며,

 

"사무엘 휴 마펫 박사의 삶과 업적을 기리면서 그분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사라고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사랑하고 애착을 가졌던 한국과 한국 사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의 한국 교회와 한국인들을 위한 헌신과 복음사역은 감히 세상의 잣대로 그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다. 지난 60년 긴 시간 동안 부부가 보여준 아름다운 복음의 길을 우리는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는 많은 신앙의 열매와 아름다운 발자국을 남기시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간 귀한 분이다"

고 말씀을 증거했다.

 

 

5.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신: 하워드 F. 마펫

(Howard Fergus Moffett, 한국명 : 마포화열(馬布和悅), 1917-2013)

 

마포화열 박사(Dr. Howard F. Moffett)는 마포삼열 목사의 넷째 아들로, 1917816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중고등교육 과정을 마친 그는 1939년 미국 휘튼대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에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484, 마포화열 박사는 31세의 나이에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는 한국이 일본 압제에서 해방이 되자, 자신이 태어났으며 아버지 마포삼열 목사가 그토록 다시 오고자 했던 한국으로 의료선교사가 되어 다시 돌아 왔던 것이다(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평양으로는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같은 해 6월에, 그는 대구 동산기독병원의 제7대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45년동안 대구 동산기독병원장, 대구 애락보건병원장, 학교법인 계명기독대학 이사장,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협동의료원장등을 역임하면서 불과 60병상이던 동산기독병원을 1천여 병상의 대형 의료원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마포화열 박사 부부는 의료·선교·교육·사회봉사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각 분야마다 획기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아울러 195310, 동산기독병원 내에 아동병원을 준공하여 6·25 전쟁 고아 아이들을 비롯해 집 잃은 난민, 수많은 전쟁미망인들에게까지 무료진료를 실시하였으며, 1948년부터 1976년까지는 대구 애락보건병원장을 맡아 수많은 나병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특히 전국 농어촌에 12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전파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362, 향년 97세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소천한 마포화열 박사는 평소 유언에 따라 아내 마가렛 마펫(Margaret Mackenzie Moffett) 여사와 함께 그 해 925일 대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은혜정원 묘원에 안장 되었다.

 

 

마펫 선교사 가문을 기리며!

한국 장로회 선교 희년 때에 한 방문자가 한국교회의 성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질문했을 때, 마포삼열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50년간 우리는 이 사람들(한국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했고, 성령께서 그 나머지를 하셨습니다.

진정 마포삼열 목사는 주님께로부터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파송된 봉명사신(奉命使臣)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아내들이 그러했고, 그 자녀들이 또한 그러했다. 이들은 천국의 마패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사망의 땅과 흑암의 그늘에 앉은 자들’(4:16)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 사명을 묵묵히 수행했다.

주님의 말씀에 인생을 걸고, 목사로서, 기독의사로서 살아가는 것은 은혜이고 축복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주님의 자녀들을 현지에 두고 강제로 황급히 쫓겨나온 상황에서, 다시 돌아가려고 처절하게 몸부림해야만 했던 고통은 가히 어떠했을까! 마포삼열 목사에게도, 마삼락 목사에게도 이 아픔이 있었다(필자 또한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이 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마펫 선교사 가문의 역사들을 살펴보면서 이 분들의 고마움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사한 것은, ‘그분들을 그분들 되게 하신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기도 하시다는 감격이었다. 아울러 필자는 우리 누가회에도 마펫 목사 가문과 같은 가문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바로 박상은 박사의 가문이다. 그 부친 되신 박용묵 목사의 ‘10만 명 전도의 꿈은 전국 방방곡곡을 향한 전도 부흥의 발길이었다. 이 가문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는 또 다른 마포삼열과 마삼락과 마포화열, 그리고 엘리스 마펫과 루시아 마펫, 아일린 마펫과 그 후손들을 여전히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문들의 축복이 나의 가정과 가문에도, 그리고 우리 누가회 가정과 가문에도 가득하기를 기대해본다.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그 동력은 우리에게 특명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심에 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13:47)”

 

 

필자소개

필자는 경희의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이자 의학박사로서, 미국 삼라한의대학원을 졸업한 한의사이기도하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현재는 건양대학교 대학원 치유선교학과 학과장 및 주임교수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