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5장 1, 4-7절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계획이 적힌 두루마리를 아무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4절), 그가 바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6절)이시다.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시고(7절), 세상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신다. 세상이 말하는 메시야 프로젝트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마르크스를 필두로 70여년간에 걸친 과학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실험은 수많은 이들의 생명과 인권을 짓밟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음을 지금 온 세상이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자본주의가 세상을 구원한 것도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아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처절한 장(헬조선, 흙수저론)이 되고 말았다. 자본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줄지언정 평안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AI가 등장하였지만, 로봇은 주목을 받지만 인간은 소외를 받고 있는, 여전히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달랐다. 그분은 바로 ‘어린 양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로마의 황제처럼 힘과 권세, 돈의 위력을 자랑하는 세상의 메시야들은 아무도 참된 구원을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작고 어린 양의 모습으로,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 무참히 죽어가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반전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구원자는 힘으로, 강함으로, 승리와 성공의 약속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약함과 착함을 추구하며, 내어주고 포기하는 것으로 참된 구원을 이루셨다. 그분의 구원방식은 세상이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성육신과 십자가, 밀알이었다. 그런 주님을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나의 삶에선 어느새 힘과 능력, 이김과 성취를 추구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어서는 결코 어린 양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 오늘도 수많은 광고와 드라마, 영화, 매스컴, SNS는 우리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세상이 말하는 구원, 세상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갈망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야 할 구원의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그분이 이루신 구원을 듣고, 그분이 이루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한다. 그것이 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가 경청해야 할 이야기이며, 주목해야 할 비전이다. |